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일본원정 (문단 편집) === 원나라와 고려의 원정 준비 === 이후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2차 일본 원정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갑자기 적극적으로 참전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물론 원나라의 부마국이라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도 현실이었다.[* 일각에선 '몽고의 침략과 동시에 50년 전부터 출몰해 약탈을 해대기 시작한 [[왜구]]가 지긋지긋한 데다가, 원나라와의 관계를 가까이 하여 지분을 얻고 원나라의 앞잡이 [[홍다구]]가 고려에서 패악질을 벌일 틈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고도 하나 1차 원정 동원때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날린 고려가 '''또 휘말리면'''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휘말린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매도 먼저 맞으려고 했다는 게 옳을 것이다.] 쿠빌라이가 재차 고려에 군함 건조를 명하자 사신을 파견해 환영의 뜻을 밝혀 호의를 샀고 이에 쿠빌라이는 고려에서 마음껏 패악질을 벌이던 권신 홍다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1280년 2차 원정을 위한 연합군이 편성되었는데, 동로군과 강남군으로 나뉘어서 편성했다. 동로군은 원나라군과 고려군으로 구성되었는데 북중국 출신들로 구성된 원나라군 지휘관은 훈둔과 홍다구였고 고려군 지휘관은 김방경이었다. 병사 수는 원나라군 1만 명, 고려군 전투병 2만 명, 뱃사공·수부 1만 7천 명, 함선 9백 척, 군량 12만 3000석이었다. [[광동성]]과 [[푸젠성]], [[저장성]] 등 남중국인들로 구성된 강남군은 주로 옛 남송 출신들이었는데 병사 수는 10만에 지휘관은 범문호였다. 강남군은 그 특성 상 주로 수군이었다. 숫자로 보면 강남군이 훨씬 많지만 실제론 전함에 무기보다는 괭이·삽 등의 농기구와 씨앗 등을 잔뜩 실은 데다 병사 대다수는 급히 징집하여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남송군 중에서도 가장 약해빠진 집단이었다. 주력은 당연히 동로군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2차 원정당시 연합군은 1차 원정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았고, 숫적 주력인 남송군 측은 기술자나 농사꾼 등이 태반이었던 것으로 보았을 때, 2차 원정의 본래 목적은 일본 내에 상륙하여 거점을 마련하고 둔전을 하면서 실제 정복을 담당할 대규모 원군 본대가 올 때까지 대기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시각이 주를 이루고 있다. '''1281년 음력 5월 3일, 원정 준비가 끝나자 여몽연합군은 [[고려]] [[경상도]]의 [[마산합포구|합포]]를 출발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